인삼의 전래 및
재배의 역사
일본에 있어서 고대로부터 인삼(P. ginseng C.A. Meyer를 말함)은 자생되지도 않았고 외부로부터 이식한 일도 없으며 따라서 인삼을 약용으로 사용한 적도 없다고 한다. (A.D. 414: 일본서기). 그 후 456년에는 신라에 이어서 백제나 고구려로부터 명의들이 일본에 건너가 의를 업으로 하였다고 하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인삼은 전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701년 문무천황의 천보원년에 별정된 의사제도에는 「의생은 "갑을경" "맥경" "신수본초"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중 『신수본초』에는 인삼이 약제로서 등재되어 있다. 또한 733년에 발행된 것으로 전해진 『출운국풍토기』에 인삼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것은 「ニユク」라 불리며 현재의 인삼과는 별개의 식물이라고 한다. 737년에는 당시 크게 유행되었던 임진에 인삼탕 복용을 권한 바 있으며 739년 발해 문왕 때 인삼 30근을 예물로 받은 바 있다고 한다. 그 후 인삼은 수시로 한국으로부터 예물 또는 물물교환으로 일본에 수입되었으며 약용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일본에 현재 자생하고 있는 죽절인삼이 약용으로 이용되었거나 또는 재배된 연대는 미상이다. 일본에 있어서의 인삼재배는 1607년 설과 1720년경 국내 생산분으로는 부족하여 수요에 충족하고 금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재배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728년에 만주삼과 한국삼종자 60입과 야생인삼 8본을 "일광"에 식재하여 처음으로 성공하였다고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인산재배는 두 가지 설 외에도 몇 가지 있으나 사적기록이 명확치 않다 전자의 경우 즉 1607년경 좌등신소(佐藤信瀟)의 『본초육부 경종법』에는 한국종이라 하여 한국으로부터 종자를 수입하여 「이달정종(伊達政宗)」과 「좌죽의선(佐竹義宣)」에게 명하여 재배토록 한 기록이 『관난간기』에 있다고 하나 그 서적자체의 저자는 아직 발견 조사되지 않고 있다 한다. 또한 당시의 한일간의 수교에 있어서도 공식적으로는 인삼종자를 주었거나 받았다는 사기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對馬島(대마도)에서도 인삼을 재배하였다고 하나 이는 한국으로부터 생근을 수입하여 땅에 묻어 두었던 것을 상거래에 이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초육부경종법』에 있는 인삼재배는 「좌등신소(佐藤信瀟)」의 고조부가 조선종 인삼을 얻어 식부하였다고 전해져 오는 것뿐이다.
통상거래에 의해 일본에 인삼이 수입되어 약용으로 이용되고 그 성가가 높이 인정되니 인삼의 수요는 증가되고 공급에 부족현상을 초래하면서 자급책을 논하게 되었고 그 발단을 보면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막부에서는 학자들로 하여금 인삼재배에 대한 내신서를 제출케하여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1727년(亨保 12년) 12월 12일과 동월 28일에는 2차에 걸쳐 한국으로부터 종자를 비밀리에 가져갔으며 1728년 8월 28일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수야화천수(水野和泉守)」를 경유하여 인삼종자 60입과 생근 8본을 가지고 인삼재배를 시도하였으며 「화전장순(和田長純)」으로 하여금 『인삼변(人蔘辯)』을 저술케 하고 인삼재배를 하였으나 기술의 빈곤과 기후, 토질 등이 부적합한데다가 자금회전이 늦은 관계로 해서 별로 성행되지는 못하였다 한다.
근대의 일본에 인삼재배는 1945년 이전까지는 일본 국내의 생산분은 그리 많지 않았고 주로 한국에서 생산된 인삼을 위주로 이용하였거나 아니면 기타 국가에 수출하다가 1945년 이후에는 대우민부(大隅敏夫)씨가 자국으로 귀국하여 인삼재배를 복활시켰다고 보아 틀림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인건비와 농지면적의 활용 등 어려운 문제가 중복되어 재배면적이 감소되는 현상이 있다. 요즈음 일본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는 지역은 주로 장야(長野), 도근(島根), 복도현(福島縣) 등지이다.